[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
2026.03.09

 


새하얀 토게키스가 정오의 하늘에서 활보한다. 왠지 이륙하는 비행기 같기도 했다. 나는 날아오르는 토게키스를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주저앉아 위를 올려다보는 게 전부였다.

토게키스가 구름 사이를 가로지르다가 뭉게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새하얀 토게키스와 새하얀 뭉게구름,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토게키스를 타고 날아가면 알 수 있을까?

"워! 혜지님."
"아 깜짝아!!"

한낮의 여유도 잠시, 방해꾼이 등장했다. 나에게 외로움은 사치였다. 시도 때도 없이 월로가 내 옆을 졸졸 따라다녀 좀처럼 감상에 젖을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뭐하세요?"
"그냥.. 쉬고 있었어요."

"낮잠을 특이한 자세로 주무시네요!"
"아니 그, 하.... 낮잠 잔 거 아니예요."

"그렇게 믿어드릴게요."
"진짜 아니라고요!!"

월로와 나는 가볍게 투닥거리며 술래잡기하듯 잡고 잡히며 들판 위를 뛰어다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근처에 있던 세꿀버리들은 화들짝 놀라 등을 보이고 작은 날개를 빠르게 움직이며 저 멀리 달아났다.

겁이 많은 녀석들, 분명 인간을 마음껏 해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녀석들. 도망치는 세꿀버리의 뒷모습이 마치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어리석은 녀석들, 바보같은 녀석들, 모두 혜지 자신을 지칭하는 자기비하일 뿐, 세꿀버리들은 죄가 없었다.

"월로님, 세꿀버리 암수를 구별하는 방법을 아세요?"
"음? 뭔데요?"

"암컷은 저 벌집 모양 얼굴들 중 가운데 이마에 역삼각형 형태로 진한 무늬가 있어요.
"관찰력이 좋네요, 혜지님. 어떻게 아신 거죠?"

"비퀸을 데리고 다니고 싶었거든요. 세꿀버리를 진화시켜서요. 그래서 한 번은 지나가는 세꿀버리를 잡아서 애지중지 키웠어요. 한동안 제가 세꿀버리를 데리고 다닐 때가 있었잖아요, 진짜 정성 들여서 강하게 키웠거든요?"
"근데요?"

"아니 근데..!! 아무리 단련시켜도 진화를 안 하는 거예요. 분명히 이맘때쯤이면 진화하고도 남았을 텐데..."
"흐음?"

"...알고보니 제가 데리고 다닌 건 수컷 세꿀버리였어요. 얼굴에 아무 무늬도 없는게 수컷이래요! 게다가 수컷은 비퀸이 되지 못한대요. 제대로 허탕 친거죠."
"아이고, 제가 다 속상하네요 혜지님."

"그런데요 월로님.."
"네?"

"제가 애정을 줬던 진화하지 못하는 세꿀버리에게도 이미 정들어서 그 자체로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세상 일이 내 맘대로 되지 않더라도,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면 타협이 아니라 선택이 될 것 같아요.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간 거예요."
"타협이 아닌 선택이라.."

"월로님이 무엇을 하던, 꿈을 이루지 못하던, 현실에 만족하고 포기하는게 아니라.. 또다른 선택지를 고른거였다면 좋겠어요. 절대 타협하지 않고요."
"..........."

"사랑하는 걸까요? 누군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면 정말 사랑하는 거래요. 세계 재창조를 해내는 월로님도, 그렇지 않은 월로님도, 과거의 월로님도, 지금의 월로님도, 먼 미래의 월로님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월로를 등지고 이야기했다. 이 말을 내뱉은 직후에 당장 뒤돌아 월로의 얼굴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월로도 마찬가지로 내가 자신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도록 그대로 두었다. 보이지않는 서로의 얼굴에는 무엇이 서려있었을까, 행복함이었을까, 슬픔이었을까, 그냥 모르는 채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조용히 서로의 손을 잡고 아무말 없이 걸었다.
목적지는 모른다.
 
걸어가는 곳의 종착지가 목적지가 되겠지.
세상의 모든 걸 알 필요는 없다는 걸 안다.
 
산들바람 소리가 전부였던 적막 속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숨기고 있었을까. 그 와중에 뭉게구름은 여전히 바람 따라 천천히 흘러갔다. 어쩌면 우릴 따라다니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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