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If / 월로 팀장님, 제발!]
2026.03.28



키보드 자판 두드리는 소리,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
여기저기 들려오는 전화응대,

비품 정리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
따뜻하지만 건조한 공기,



나는 이곳에 소속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방인이다.
상사의 지시를 받고 업무를 이행하고,
실시간으로 상황 보고를 하는 것의 반복.

생계를 이어나가며 어떻게든 사회 안에서 동화되고 있다는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

주변은 업무적인 대화만이 오가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돈다.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하는 와중에도 나는 구원을 원하고 있다. 이 지루한 쳇바퀴속에서 누군가 꺼내 줄 거라는 자해같은 망상을 하며 스스로 희망고문을 하는 자기자신이 정상은 아닌 것 같다.


-
현실에 순응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놔버리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ㅡ. 라고 생각하며 혜지는 정신없이 업무를 봤다. 아무리 빨리 쳐내도 쉴새없이 들어오는 일들 안에서 질식할 것 같았다.


"혜지님, 혹시 지금 바쁘세요?"


그와중에 뒷통수에서 일감을 더 가져온 상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망설이는듯 우유부단한 목소리, 이것마저 미안함을 포장하려고 가증스럽게 처세를 하는 것만 같아서 불쾌했지만, 미소를 머금고 상사를 향해 뒤돌아 이야기했다.


"네! 조금 바쁘지만, 무슨 일이실까요 팀장님!?"

"이번에 새로운 거래처가 생겨서요. 혜지님이 워낙 강성고객도 컴플레인 없이 꼼꼼하게 잘 케어 해주시니까 관리해주셨으면 해서요."


그럴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거절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닌 것을 알고 있으니 어쩔수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 어느 업체인가요!? 인수인계 자료랑 요청사항 같이 넘겨주시면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투자금이 많은 업체라서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혜지님!"



상사는 조금 신난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정말 얄미워, 저 팀장님도 어쩔수없이 내게 일을 줘야하는 역활이라는 걸 잘 알지만서도. 혜지는 팀장님의 뒷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월로 팀장님은 내 취향으로 잘생기고 붙임성도 좋아서 왠지 미워할수가 없구나.'


안그래도 과열된 업무상황에 한숨을 쉬면서도 좋아하는 팀장님과 소통을 하는 건 너무 설레서 기분이 붕 떴다. 혜지는 공과 사를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 싫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모인 건 돈을 벌고 사회의 일원으로써 살아갈 목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 알아서 쓸쓸해졌다.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로 정신없이 밀린 일을 쳐내고나니 슬슬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보통 사무직 회사에는 이렇게 따로 쉬는시간이 마련되어있지 않고, 유도리 있게 개인이 알아서 쉬는게 일반적인데 이곳은 회사내규로 업무시간과 쉬는시간이 분리 되어있었다.

뭐, 법적으로 정해진 시간 이상 하루동안 일하면 의무적으로 어느정도 무급 휴게시간을 줘야 하기 때문에 쉬는 걸 알았지만 맘 놓고 대놓고 쉴 수 있는 분위기의 회사도 흔치는 않으니까, 이 시간만큼은 직장동료들과 주변 산책을 하거나 대화를 하며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다.


"혜지님, 잠깐 나와서 같이 좀 걸을래요?"

"네? 아...네!"



의자에 축 늘어져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불쑥 나타난 월로 팀장님의 제안에 혜지는 깜짝 놀라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했다.


'나 뭔가 실수했나?'


솔직히 이때 감정은 설렌다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던 것 같다. 무슨 일이길래 나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 하려고 하는거지? 나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회사사정 때문에 직장을 잃거나 다른 문제가 있는지 혜지는 안절부절 못하며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으로 월로 팀장님을 따라나섰다.

뒤를 돌아보니 직장 동료들의 의아한 표정과 나처럼 불안해보이는 눈빛을 보냈다. 대충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라고 얼굴로 이야기 한다던가, 직장내 괴롭힘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지 걱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 진짜 조졌나, 싶은 기분에 심장이 쿵.쿵.쿵.뛰어서 어쩔줄 몰랐다. 이대로 걷다가 당장 어딘가 빨려들어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사내 건물 엘리베이터를 월로 팀장님과 단 둘이 타고 1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은 어색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혜지님, 갑자기 이렇게 따로 부른 건.. 별 건 아니고,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데요.."

"아... 네! 편하게 얘기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별 거 아닌 말을 이렇게까지 위화감 조성하며 따로 불러서 해야만 하는거냐, 라고 혜지는 속으로 생각하며 이빨을 갈았다.


"그..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네? 뭔..가요?"

"그, 저, 하...."


월로 팀장님은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며 민망한듯 머리를 만지작 거리고 뒷목을 만지며 횡설수설 했다. 혜지는 예상치못한 월로의 반응에 벙졌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진짜 별 거 아닌 건가 보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근데 뭔데 나한테만 이렇게 뜸들이는 걸까.. 대형사고라고 치셨나...'


뭔가 피곤한 일에 엮인 것 같은 혜지는 지루한 듯 조용히 월로를 바라봤다. 그때 월로가 입을 열었다.


"혜지님, 이번 주말에 괜찮으면... 한번 볼래요? 제가 개인적으로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같이 봐줬으면 해서요.. 물론, 혜지님이 서포트 해줬다고 위에도 같이 보고할거고, 연봉협상이나 승진에도 도움 될 거예요!"

"아... 저야 좋죠!! 제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요, 몇시까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와..! 불편하면 어쩌나싶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사내 메신저 통해서 남겨놓겠습니다. 모처럼 나왔으니 카페 들러서 커피 사드릴게요!"

"감사합니다..!!"



.
.
.


-
그랬었는데, 회사에서 유리한 연봉협상과 승진기회와 라인을 잘 타고 싶었던 게 전부였는데, 어느새 월로 팀장님과 함께 데이트 장소로 가볼법한 레스토랑에서 단둘이 식사를 하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어라, 그러다가 산책 좀 하자고 해서 좀 외로우신가 싶어서 같이 말동무도 좀 해드리고 믿음직한 부사수의 인상을 하고자 열심히 리액션도 해주고 노력했는데, 사람 없는 공원에서 어느새 난데없이 이 사람이랑 입을 맞추고 혀를 뒤섞지 않나, 벤치에 앉아서 연인놀이 하는 것 마냥 애틋하고 즐거운듯이 얘기하고 손을 잡고,


그 뒤로 기억이 없다.
눈을 뜨니 낯선 천장 침대에 누워있었고, 내 옆에는 날 안은채로 잠들어 있는 월로 팀장님이 보였다.


'X됐다.'


내 회사생활은, 아니, 내 인생은 이렇게 꼬이기 시작했다.




- 글 밖의 말

개인적으로 사내연애는 말도 안 되는 것에 가깝다고 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그래. 아무리 좋게 봐도 그냥 아묻따 협력하고 잘 지내야하거나 속으로 칼을 품거나 하는게 직장동료이자 직장상사지.. 물론 상사라도 그런 생각이 안 들고 좋은 분들도 계시지만 인간적인 호감 이상으로 감정은 안 생기는 것 같아..ㅠ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보고 싶었던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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