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2026.05.23



스피넬은 조금 놀랐다.


하얗게 꽉 차있지만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없던
커다란 흰 도화지 위에 누군가 연필로 선을 그어놨다.

아무렇게나 그어버린 삐뚤거리는 줄,
드드득, 까만 선들이 하나 둘씩 더 많아진다.

선들은 어떤 형상을 나타내는 그림이 된다.
어떤 그림일까 나는 뒷걸음질치며 주시한다.


내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도화지를 가득 채운 건 혜지였다.



모서리에서 여전히 내 도화지를 더럽힌다.
뒤를 돌아 보란듯이 나를 보며 웃는 당신,
당신은 내 세상을 기만하듯 쉽게 더럽혔다.


더럽혔다? 더럽히다?
내 세상을 더럽힌 게 맞을까?


언제든 지워버릴 수 있는 연필 자국이지만 그대로 방치해버리고, 혹여나 당신의 그림이 손상될까 매일 살펴보는 나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상에 당신이 들어왔다.
나는 당신을 조용히 바라만 볼 뿐이었고,
당신은 그곳을 당신만의 흔적으로 채워나갔다.


당신의 흔적을 사랑하게 된 나를 보며, 당신은 이 낙서들을 금방이라도 지울 수도 있는데 왜 그러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나는 지우기 싫다고 이야기한다.
덧칠도 싫고. 남겨두는 쪽이 좋겠어요.

내 말을 들은 당신은 흡족한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럼 계속 남겨두면 되겠네요. 코팅까지 해서 지워지거나, 덧칠 되거나, 망가지지 않게끔 잘 관리해줘요.

나는 당신의 대답을 듯고 어쩔수 없다는듯 피식 웃으면서,
욕심이 많네요. 잘 관리할게요.

당돌한 당신은,
잘 관리해줘요. 전 원래 욕심이 많아서요. 그래서 욕심이 많은 당신도 좋아하나봐요.


언제든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깜짝 놀래키는 선물 같은 당신, 그런 당신을 사랑했다.


"스피넬, 괜찮으면 앞으로도 자주 봐요. 아니, 저희랑 같이 다니기로 해요. 출소하고 적적하지 않아요? 재밌는 일을 벌여요. 저희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거예요."

"저는.."


당신의 제안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요. 잘 부탁드려요, 혜지."








- 글 밖의 말
월로혜지가 공의존과 포용이었다면, 월혜스피는 어떤 그림이 될지 모르겠다.

혜지가 모든 걸 잃고 출소한 스피넬의 텅 빈 내면에 무형(無形)의 무언가를 주게 됨. (그것을 낙서로 표현.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형태를 종잡을 수 없는)

스피넬은 그것을 지우거나 덧칠하는 등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임. 스피넬 역시 혜지를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함.. 내면에 변화가 생기는 거겠지. 혜지는 그런 스피넬의 모습이 역시 좋음.


월혜스피가 세계재창조를 목적으로 돌아다니지만,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그럴듯한 명목을 내세우며 같이 다니는 건 아닐까.. 너네 왜 셋이서 다녀? 라고 말하면 대답은 해야 할 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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