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
2026.03.31

 

어느날부터 월로는 혜지가 남기고 간 옷자락을 매만지며 홀로 그녀를 떠올리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지독한 습관이 생겼다.

누군가를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곧 열병처럼 온 몸에 번져, 결국엔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무력한 일상을 만들고야 말았다.

강박적으로 혜지를 떠올렸던 이유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가신 성격 때문이었을까,

월로는 혼자 혜지를 생각하다 새벽이 넘어가서야 눈을 붙여 잠에 드는 일이 잦아졌고, 은행상회 일과 신화조사를 병행하다보니 피곤해진 몸이 과로의 신호를 보냈다. 입안이 모두 헐어버린 것이었다.

'괴롭다.'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신이 저주를 내려서일까.
세계재창조라니, 신을 복종시킬 것이라느니 불경한 마음가짐을 가진 나를 고쳐먹기위해 내리는 신의 형벌일까.

단지 이 몸 하나 때문에 아르세우스는 다른 세계의 여자를 히스이로 데려온 걸까?


방금 건 본인이 생각해도 조금 어이가 없어서, 월로는 큭큭 작은 소리로 웃다가 금방 괴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간 혜지의 존재감에 나의 모든것이 빨려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미 나는 돌이킬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만 것일까.


매일 자신을 괴롭히는 이 초조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쿵쿵 거리는 심장의 울림이 마치 제몸이 스스로에게 '어서 이 정체불명의 열병을 낫게 하라'고 등떠밀며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밤새 월로가 시름시름 앓고 있을 동안, 별들은 지평선 저멀리 떠나가고 동이 트는 아침이 되었다.

창문 너머 찌르꼬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월로는 밝아진 주변을 보고 잊고있던 무언가 떠올랐다는듯 고개를 들어 다급하게 나갈 채비를 하며 몸단장을 했다.


혜지, 혜지를 만나기로한 아침이 다가온다.
시간약속만큼은 칼같이 지키는 월로였기에, 그녀를 기다리게 만들수는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저 멀리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혜지가 금방이라도 뒤돌아 새하얀 얼굴을 드러내며 새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볼 것만 같았다.


매일 보는 그녀인데도 항상 가슴이 떨리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월로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숨을 한번 길게 내쉬었다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혜지와 가까워질수록 그는 겁이 났다. 점점 더 커지는 심장박동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손끝부터 온몸이 떨려오는 감각이 선명해져만 갔다.

월로는 몇초동안 머뭇거리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아 울렸다.

"혜지님!"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홍채와 촘촘한 속눈썹이 시야에 들어왔다. 뒤돌아보는 찰나는 짧았지만, 월로에게 이 순간은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혜지의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볼수밖에 없었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여태까지 자신을 좋다고 청혼한 여자만 수두룩 했었는데, 이 여자의 존재감은 그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거대했다.


"보고싶었어요."

"저도요."

"이제 뭘 하러 어디로 갈까요?"

"글쎄요, 그런 건 먼저 만나자고 한 사람이 정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앗, 그러게요. 너무 생각이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럴수도 있죠.
저도 생각없이 나온건 마찬가지에요.
어디든 길 가는 곳 가다가 아무곳이나 들를까요?"

"좋아요, 가끔씩 이런 것도 괜찮은 것 같네요."



두 남녀는 축복마을의 정문을 지나 흑요들판으로 걸어나간다. 처음 만난 장소에서 멀어질수록 조잘거리는 대화가 점점 묵음처리되듯 사라져간다.

발 닿는대로 히스이의 어딘가로 모험을 떠난다.

세계재창조를 위해.
세상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서로의 존재가치를 찾기 위해.



"월로님."

"네?"

"사실 저도 오늘 잠을 좀 설쳤어요, 마음이 앞서서 쉽게 눈을 감을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그래요. 그나저나 저 그렇게 피곤한 티 심히게 나나요?"

"네, 우리 둘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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