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월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세계재창조를 향한 야망과 치기는
어느새 빛바랜듯 희끗해진 머리카락처럼 옅어졌다.
나는 무엇을 고민하고 헤메이는가.
모든 것은 내 안에서 결정되었고,
여기까지 제발로 걸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원망할 수 없었다.
세상탓을 하던 젊은이는
세상 속으로 녹아들었다.
월로는 어떤 결심을 하고
그리운 사람에게 보낼 편지를 적었다.

"시간과 공간이 뒤죽박죽인 말도 안되는 세상에서 언젠가 돌고돌아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것이라 믿고 펜을 들었습니다. 강한 염원을 품은 물건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압니다.
매일 당신이 나오는 꿈을 꾸곤 합니다.
드디어 아르세우스를 굴복시키고,
세계재창조에 성공했다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당신과 나는 기쁨에 서로를 부둥켜안습니다.
꿈에서 깨고 눈을 뜨면,
그때부턴 무서운 악몽이 시작됩니다.
당신이 없는 현실이 가짜 같습니다.
당신이 존재하는 꿈이 현실 같습니다.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할리 없는 당신을
내 앞에 불러다놨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나는 서로를 가엾게 여기며
사랑에 빠져 가족이 되었습니다.
원래 내 곁에 있어선 안 되는 당신이
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나는 당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당신밖에 없던 나는 당신을 빼앗겼습니다.
나는 텅 빈 채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수십, 수백번의 만남과 헤어짐도
당신만큼의 깊이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내가 정말 원했던 건,
당신과 행복한 미래였습니다.
영원한 행복이 보장된 미래,
슬픔 따위 없는,
그런 해피엔딩을 바랬습니다.
결국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떠나게 됩니다.
빈손으로 찾아온 당신을 떠올리며,
나도 빈손으로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이 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마치 끝을 알고 있었다는 듯
구원이라도 받은 듯이
노인은 마지막까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들은 노인을 빙 둘러싸고 횡설수설했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
근처에 지나가던 행인이 신고하여 출동한 구급대원이 노인을 일으키고 심폐소생술을 시켜봤지만, 노인은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래였다.
노인의 가슴팍 안주머니에서 누군가에게 전해주려던 편지봉투가 툭 떨어졌다.
- 글 밖의 말
그냥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라는 말이 떠올라서 쓰게 된 글
현대까지 오래 살아남은 월로가 언젠가 늙어서 그리운 사람(아마도 혜지)을 따라가는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떨까 싶었어. 서브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건 그냥 월로와 혜지가 함께하는 평행우주 중 하나라고 봐주면 되겠다.
내가 상상했으니 어딘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겠지.
내가 쓴 글로 당신도 월로와 혜지를 떠올렸다면, 이 세계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거야.
그리고 집착이 강한 물건은 언젠가 돌고돌아 받아야할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않을까, 우리에겐 시간이 지나 퇴행하는 육체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니 분명 그러고 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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