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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는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수 있는지도 미지수고, 히스이는 우리와 같은 세계의 현대인이 살기에는 너무 위험하기도 하지. 까딱하면 죽을지 몰라.
그렇지만 혜지는 현재에 집중하는 사람이야. 과거를 반추하더라도 눈앞에 놓인 지금의 나를 더 우선순위에 두니까. 어떤 환경으로 가서 열심히 노력하는 혜지야, 뭐 적응력도 좋은 편이고 성격도 유해서 처음이 힘들지 가면 갈수록 히스이 안의 사람들과 녹아들겠지.
또다른 외지인이 보면, 그녀가 원래 히스이에 살던 사람인줄 알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야.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처지인 윤슬과 어울리며 나름 위안을 갖고 어떻게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희망도 놓지 않았을거야.
하지만 이곳의 생활에 적응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는데 사람이 스트레스를 안 받을리가 없을테고 정신이 멀쩡할리가 없잖아?
아마 은하단 숙소에서 피곤해서 골아떨어지는 날이 아니면, 종종 혼자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쨌든 혜지는 최선을 다해 강한 척 하며 살아왔어.
월로는 그런 혜지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윤슬과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면 달라졌을 미래를 생각하며, 처음부터 본 목적을 꺼내 '협력자' 포지션으로 설득하기로 해.
혜지는 윤슬만큼 대단한 히스이의 영웅도 아니며, 신의 가호를 받은 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 이방인이잖아. 함께 하다 보면 세계 재창조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찾을지도 몰라. 여기까지가 월로의 계획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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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로는 혜지가 축복마을에 정착할수 있게끔 적극적으로 챙겨주고 도와줬어. 자신과 함께 있을 때 혜지는 편안해 보였지만, 동시에 경계하는 듯 보였거든. 아무래도 혜지 입장에선 낯설고 키도 굉장히 큰 성인 남성에게는 거리를 두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 같으니까.
월로는 경계심부터 허물어야겠다는 생각에 자주 그녀 앞에 나타나곤 했지. 그 과정에서 혜지도 어느새 월로에게 경계를 풀고 표정에는 어색함이 점점 사라져갔어.
혜지는 윌로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고, 누가 봐도 마음을 연 것 같았지. 이성으로서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사람으로서는 말이야.
월로는 그런 혜지에게 적당히 휘둘리면서 어울려 주었어. 조금은 엉뚱하지만 긍정적이고 어린아이같이 밝은 그녀의 모습도 싫지만은 않았지.
그러다가 어느 날은 혜지가 야간 임무를 수행하다 월로와 우연히 동선이 겹치는 상황이 생겨.
월로는 혜지에게 같이 야영을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가 어디까지 자신에게 곁을 허락해 줄지 떠볼 목적이었어.
혜지는 조금 불편한 내색을 보였지만, 그래도 자신과 잘 어울려주고 도와줬던 월로니까 그의 제안을 허락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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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와 월로는 함께 야영을 할 곳을 찾아 텐트를 치고, 나뭇가지를 모아 차가운 밤을 따뜻하게 해줄 모닥불을 피웠어. 두 사람은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지.
어쩐지 조금 센치해지는 밤이야. 눈앞에는 타닥타닥. 따뜻한 불이 일렁이고, 남녀 둘이서 멀지 않은 거리에 앉아있었지. 한낮 동안 열심히 돌아다닌 탓인지 기진맥진한 둘은 축 처진 채로 앉아서 가만히 모닥불만 바라보다가, 월로가 입을 열고 침묵을 깨버렸어.
"혜지님이 원래 살던 곳은 어떤 곳이었어요?"
"음.. 일단, 포켓몬이 없었죠. 인간 외에는 포켓몬 대신 동물, 식물, 무생물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세상을 차지했었어요. 그리고 그곳에는 문명이 발전해서 여기보다 살기 편했죠. 이렇게 야생에서 위협을 받는 일은 드물 정도로요.
... 그래도 하늘과 나무, 숲, 땅, 비슷한 건축 양식의 집은 똑같이 존재했어요. 이곳과 마찬가지로 낮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해가 지고 달이 떠올라 있었죠."
"그래도 비슷한 부분은 있어서 다행이네요. 혜지님이 살아왔던 세계도 조금은 궁금해지는군요."
"하하, 저랑 같이 히스이를 떠나 제가 살던 곳에 영원히 살지도 모른대도 궁금할까요?"
"제가 경솔했네요.. 혜지님께 말실수를 했을까요?"
"아녜요, 괜찮아요. 여기에 갇혀버린 이방인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게.. 조금 심술이 나서 장난좀 쳐봤어요."
"말에 뼈가 있는 걸요?"
"하하.. 너무 공격적이었을까요? 저야말로 미안해지네요."
"..혜지님은 원래 있던 곳에서 뭘 했었나요?"
"그냥 평범하게 직장 다니던 사람이었어요.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족도 있었죠. 지금은 멀어졌지만 친구도 있었네요."
월로는 조용히 혜지를 바라보다가 또다시 질문을 했어.
"소중한 것들이 많은가보네요, 돌아가고 싶어요?"
"그거야 당연히.. "
혜지는 당연한 질문을 재차 확인하듯 물어보는 월로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어. 말없이 격양되어 흔들리는 눈동자로 월로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땅으로 돌려 고개를 떨군 채 침묵했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제 정체성도 모르겠어요.
축복마을의 은하단 조사대원인지, 원래 살던 곳에서 평범하게.. 아니, 이제는 이곳의 일상이 평범해졌지만...
소중했던 가족도, 사람들도, 기억들도 점점 뒷전이 되어가요. 이게 맞는 걸까요? 어떻게든 살아가려, 혹시나 쓸모가 없어져 추방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수록 원래의 나를 잃어가는 것 같아요. 저는 영영 이곳에 갇혀 살아가게 될까요? 죽을때까지, 혼자서?"
혜지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지더니, 눈가에 눈물이 고여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어. 월로는 당황했지. 여태까지 우는 얼굴은커녕 큰 불평불만 없이 잘 적응했던 혜지가, 강해 보였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혜지가, 가장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니.
"월로님, 저는 여기에 떨어진 이후로 쭉 혼자인 것 같아요. 모두가 저에게 친절하지만, 저 빼고 다들 각자 돌아갈 집이 있는 것 같아요."
"혜지님...."
월로는 이상한 불쾌감과 함께 가슴이 울렁거렸어.
눈앞에 있는 건 명백한 이방인 여자, 하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는 약한 존재.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탈락한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
약한 것은 나쁜 것, 강한 것은 좋은 것.'
그녀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외롭고 나약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눈앞에 나타나서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어.
월로는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지도 못해서 미칠 것 같았지. 사실 이런 적이 없었던 건 아냐. 히스이를 구한 영웅인 윤슬도 마찬가지로 축복마을에 추방되어서 혼자 남겨졌을때, 가장 취약할때를 노려서 다가갔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혜지는 영웅도,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도 아니잖아? 포켓몬은 커녕 히스이의 생태계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언제든지 쉽게 죽어버릴 수 있는 여자.
그렇기 때문에 동정하게 된 걸까? 월로는 알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금방 연소되어 버릴 싸구려 감정이라고 생각했어. 월로는 조심스레 다가가 양팔을 벌려 혜지를 끌어안고 안심시키기로 했어.
"혜지님, 제가 있으니 괜찮을 거에요.
생각해보세요, 항상 제가 곁에 있었잖아요"
월로의 말에도 혜지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소리를 냈어. 월로도 감정에 동요하며 어느샌가 눈시울이 붉어졌어. 사실 저 말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거든.
'계획이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틀어졌다.
협력자라는 건 이런게 아냐.
내가 원했던 건 증오하는 이 세계를
무(無)로 되돌려 다시 재창조 하는 것.
이 여자는 쓸모를 다 하게되면 사라지는 것.
쓸모를 다 하지않아도 필멸자의 운명에 따라
한줌의 흙이 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
마음은 함부로 줘선 안 되는 것.'
월로는 여전히 혜지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손을 덜덜 떨며 동시에 가슴속 무언가가 끝없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 미약한 죄책감이 들면서도 이건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일이라며 끝없이 되뇌었지.
그리고 이 감정을 두려움이라고 멋대로 단정지었어.
"제가 혜지님의 가족이 되어줄수도 있지 않을까요?"
"네?"
"저는 아주 옛날부터 혼자였어요, 그런데 당신과 같이 있다 보면 그런 사실조차 다 잊은 채로 존재할 수 있어요. 혜지님, 당신만 할 수 있는 거예요."
"............"
월로는 횡설수설, 본인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을 해버렸지. 그게 둘의 관계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줄 알면서도, 혜지가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선택지를 직접 쥐여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이건 자신의 계획을 위한 밑작업이라고 끝없이 합리화하면서 간절하게 혜지를 끌어안았어.
심장 박동소리, 모닥불 장작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 거칠게 가빠지는 숨소리, 덜덜 떨리는 몸, 서로의 후덥지근한 체온, 발화점에 도달한 □□□
- 글 밖의 말
순수하게 사랑하려면 각자 목적을 갖고 만난 두 남녀가 함께 다니면서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있어야하지 않을까.. 단순한 성적인 끌림 이상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 자신을 투영하고,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지켜주고 싶고 그런..
순애를 보고싶다면, 순애를 위한 발화점이 반드시 있어야하지 않을까.
성욕과 사랑은 사실 누구에게나 느낄 수 있고, 그다지 특별하진 않아. 하지만 진실되고 순수한 사랑은 희소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단순히 시시한 사랑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사람을 금방 성장하게 만들어주는 촉매 역활도 하거든. 상대방에게 무형과 유형의 뭔가를 진심으로 주고받는 경험은 귀중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헤어진 후에도 깨달음을 얻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는거야.
내가 상대방에 모든걸 퍼주고 정성을 쏟아붓다가 헤어지더라도, 나는 이미 상대방에게서 무형의 무언가를 받았기 때문에 절대 손해가 아니라는 거지.
나는 이런 농도깊은 찐사랑을 보고싶은건데,
찐사랑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내가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그사람만한 대체재가 없어야겠지. 단순하게 잠재적 경쟁자가 없다는 걸 의미하는게 아니라, 서로에게 길들여져야 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이야기 다들 알지?
소행성 B612에 살던 어린왕자가 우연히 자신의 별에서 피어난 장미를 보고 사랑에 빠져. 하지만 장미는 아름답지만 너무 까탈스럽고 까칠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를 사랑하는 왕자는 정성스럽게 장미를 돌보지.
그러다가 왕자는 소행성을 떠나 여러 별을 거쳐서 지구로 오게 되는데, 그곳에선 왕자가 지극정성으로 돌봤던,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장미가 가득 피어있었지.
왕자는 특별하게 여겼던 장미가 수많은 장미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고 상심했지만, 여우를 만나 서로를 '길들인다'는 개념을 알아가.
하지만, 머지않아 왕자는 지구를 떠나야하는 시간에 가까워지게 되면서, 왕자와의 이별을 앞둔 여우는 말하지.
"네 장미가 중요한 존재가 된 건,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그리고 왕자는 자신이 두고온 소행성의 장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마음 아파하며 장미를 연민하고, 그리워하게 돼.
이게 사랑의 본질 아닐까?
몇번씩이나 어린왕자를 읽으면 눈물이 나.
날 슬프게 하고 많이 울게했던 일들을 다시 떠올릴땐 이제는 덤덤하게 지나갈 수 있지만, 이 책에서 주는 순수함과 마음을 울리는 근본이 있으니까.
어린왕자와 장미같은 사랑을 하고싶어.
비록 어린왕자는 장미 곁으로 갈 수 없었지만, 그런 슬픈 결말이 아닌 서로가 서로의 소중함을 알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 말이야.
편리하게 외적갈등이 없고 내적갈등만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 이것도 날로 먹으려는 못된 심보일까?
사실 그래서 드림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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