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에 빠지는 계절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계절에 사랑에 빠질 확률이 높다는 걸 어디선가 들었다.
나는 벚꽃이 본격적으로 만개한뒤 서서히 지기 시작하는 4월에 생애 첫 눈을 떴다.
하지만 단 한번도 봄에 사랑에 빠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빠지기 시작한 건 항상 봄이 찾아오기 직전인 겨울이었다.
아마도 추위 속에서 외로움이 너무 깊어진 나머지 본능적으로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았던 걸지도 모른다. 유독 계절을 탔을거라는 얘기다.
한겨울의 중심인 12월, 나는 '히스이' 라는 곳에 떨어져 이곳에서 지금까지 정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처음 본 금발의 곱상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이제와서야 되돌아봐도 잘 모르겠다. 왜 굳이 이 남자였을까?
남자와 나는 원래 그럴 운명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 사람이 대화를 잘 이끌어주는 건지, 정말로 우리가 잘 맞는건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얘기하다보면 그냥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자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간가는줄 모르고 나눴다. 몇번씩이나 별로 가득찬 심야의 밤하늘이 정신차리고보면 어느샌가 밝아져 동이 트고 있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재밌게 대화를 나눠본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남자의 이름은 월로. 생긴것처럼 이국적인 이름이었다. 요 근방 사람들은 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유독 월로는 다른 세상 사람처럼 위화감이 들 정도로 눈에 띄었다.
한번은 내가 월로에게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어딜봐도 이미 사춘기는 훌쩍 지난 성인 남성인데, 아마 누군가를 연모했을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거라고 확신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우월한 유전자를 두고 주변에서 가만 놔뒀을리가 없다. 그런것치고 히스이의 미의 기준은 내가 살던 곳과 많이 다른가 싶을정도로, 이곳의 사람들은 월로에게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의아했지만 말이다.
월로는 기억을 되짚어보듯 한손으로 턱을 괴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몇초간은 그렇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열심히 생각하는듯 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특별히 누군가를 좋아했던 일은 없는 것 같은데요."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정직하게 들어낸 내 표정을 보고 월로는 살짝 난처한듯한 얼굴을 하며 이야기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이어지는 월로의 물음에 '나의 편협함 때문에 이 사람에게 당연한 일을 무례하게 반응한 걸까?' 아차 싶어 빨리 수습을 하고자 급하게 대답했다.
"아, 아니요! 그냥, 월로님같이 멋있는 분이라면 누군가와 연애를 했던 경험은 있을 것 같아서요. 제가 무례한 반응을 보인거라면 죄송합니다!"
어쩔줄몰라하며 미안함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나를 보며 월로는 재밌다는듯 쿡쿡 웃더니, 미소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치며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살아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거겠지만, 저는 이것조차 신경쓸 여유조차 없이 매일 긴장하며 살아왔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요.
아시다싶이 여기 히스이는 외지인에게 박한 곳입니다. 혜지님이 오시기 전에는 지금보다 더 심했었죠.
어렸을때부터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했어요.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자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살아가다보니 어느새 지금의 제가 되어있는 것 같군요.
나쁜 생각도 많이 해봤지만, 결국 죽지못해서 계속 숨을 쉬게 되었고, 소중한 것들이 생기다가도 익숙해질때쯤 잃어버리곤 했습니다. 아마 저는 만나는 모든 것들에게 이별을 염두해두고 있는 사람인가보네요. 이래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힘들겠어요."
월로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남자는 분명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조금 씁쓸한듯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이 사람의 허전함을 채우고 싶다는 묘한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아마 욕심이겠지..
갑자기 조금 무거워진 공기 때문인지 중력이 유독 잘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무거워진 건 마음인데, 몸 전체가 짓눌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땅을 바라보며 걸었다.
내 옆의 월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르는 상태로 그에게 연민의 마음을 품고있었다.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본인의 어두운 과거사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사람은 위험했으니까.
사실 월로는 그런 나를 보고 혼자 입꼬리를 올리며 은근하게 웃고 있었다.
"월로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혜지님."
"월로님의 생일은 언제인가요? 태어난 계절이라도 알고싶어서요."
나는 천천히 월로를 올려다봤다. 지극히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을 물어버린것 마냥 심장이 쿵쿵 뛰고 몸이 쭈뼛거렸다.
"월로님?"
월로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방금 전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마치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혜지님, 저는 제가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르세우스에 집착하고 매일 유적을 돌며 신오신화를 조사하고 다니는 이유가 궁금하지않으신가요?
제가 아는 건 저 자신이 '고대신오인의 후예' 라는 사실 밖에 없습니다.
저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 제가 가치가 있는 사람인건지, 왜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지 납득 하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슬픔이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을 찾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르세우스에 대한 단서를 쫓을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고요."
월로는 무언가를 원망하는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목소리에 떨림이, 자책을 하는 남자의 표정이 하나하나 눈과 귀에 새겨졌다. 이 남자의 숨겨진 자격지심과 트라우마를 건들어버린걸까.
보통은 이런 반응을 보고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겠지만, 성격이 조금 뒤틀린 나는 월로에 대해서 더 캐묻고 싶어졌다. 이 남자와 함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고, 궁금해져만갔다. 사랑에 빠진걸까?
일단 위로를 해주고 적당히 배려하며 대화를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계기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아 약간은 기뻤다.
"..... 그렇군요. 제가 감히 월로님이 겪은 일들을 모두 헤아릴순 없겠지만, 남들보다 치열하게 살아오느라 많이 힘드셨겠네요. 제가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짧은시간동안 본 월로님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에요.
도태되지 않고 더 나아지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려깊은 모습,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남을 배려해주는 듯한 기분도 들어요. 아마 그래서 제가 월로님을 좋아하나봐요"
그 말을 듣자 월로는 살짝 놀란듯 나를 바라보았다.
- 글 밖의 말
난 월로가 행복했음 좋겠어..
굳이 내가 행복을 바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살겠지만
나 등산하는걸 그닥 좋아하진 않아서 산에 오르는 데이트 해본적도 없는데, 히스이라면 자연스레 등산 데이트가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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