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속 마중나온 당신]
2026.05.16




순백동토 절벽에서 발을 헛디딘 월로는
힘없는 장난감처럼 속수무책으로 추락했다.

층져있는 절벽 턱에
툭, 툭, 탁, 터덕, 턱.
몸이 부딪혀 튕겨나간다.

나뭇가지라도 잡으려고 했건만,
당장 손에 잡히는 것도 없었으며
계속해서 부딪히는 몸의 통증을 견디기에도 벅찼다.

.
.

어느정도 지났을까,
시야가 흐릿해지며 주변이 온통 암전된다.
눈을 떴을 땐 어딘지 모를 눈밭속에 누워있었다.



눈보라 몰아치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린다.
아무래도 점점 거세지는 것 같다.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월로는 내심 죽음을 체념하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나는 눈에 파묻히고 있다.


추위는 조금씩 무뎌져갔고,
몸이 축 늘어져서 노곤노곤해진다.
눈을 감으면 다신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토록 원했던 세계재창조를 이뤄내지 못하고
이렇게 가는 것이 맞을까?


거대한 자연 안에서 연약한 인간일 뿐인 월로는 한낯 먼지 같은 존재였다. 여태까지 살려고 발버둥쳐왔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가게 되다니

몸이 서서히 따뜻해진다.
아니, 더운 걸까,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이 죽음을 어떻게 해명해야. . .

.
.
.


순백동토를 돌며 얼음귀신에 대해 조사하던 혜지는 지나가다 반쯤 눈에 뒤덮혀 쓰러져있는 월로를 봤다. 깜짝 놀라 그에게 달려간다.

월로에게 가는 발걸음마다
눈 발자국이 푹. 푹. 푹. 푹. 깊게 파였다.
발목까지는 우습게 눈밭 속으로 잠겼다.

앞으로 나아가려 다리를 들때마다,
신발에 붙은 눈송이들이 한가득했다.
어떤 건 반쯤 녹아있었다.
신발에 스며든 물기가 발을 더 아리게 만들었다.


사실 의식할 틈도 없이 월로에게 달려가느라 바빴다.


잠들어있는 월로의 얼굴을 보고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 겁에 질린 혜지는 당장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댄다.

두근. 두근. 두근.

느린 심장박동을 느끼고 안심한다.
혜지는 포켓몬들을 꺼내서 근처에 있는 진주단 기지로 월로를 데려갔다. 따뜻한 포켓몬들 품에 안겨진 월로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로 잠들어 긴 꿈을 꾸었다.

.
.
.

"월로님."

"월로님."

"월로님."


꿈 속의 월로는 혜지와 같이 살고 있는 은하단 숙소 안에서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해가 떨어졌는지 주변은 온통 어두웠고, 대문 밖에서 혜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월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입을 뻐끔거려봐도 목구멍이 무언가로 막힌듯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안에 계세요? 어서 대답 해줘요.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어요."


문 밖에서 혜지가 재촉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진짜 혜지라면 당연히 문을 열고 들어올텐데, 이 안으로 오는 것 조차 나에게 동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목소리는 영락없는 혜지인데,
지금의 상황은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똑. 똑. 똑. 똑. 똑. 똑. 똑.

"월로님,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쾅 쾅쾅 쾅 쾅 쾅 쾅쾅쾅.

"월로, 로님, 월로님,답하요."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과격해진다.
저건 분명 혜지가 아니었다.


저건 누구지?
너무 세게 문을 두드리는데, 이대로 문이 부숴지지 않을까
? 아니, 이 정도로 요란스럽게 소란 피우는 거라면, 주변에 살고 있을 사람들이 가만 있지 않을텐데...


월로는 움직일 수도, 쾅쾅쾅쾅. 목소리를 낼 수도 없이 쾅.쾅.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쾅쾅쾅쾅쾅. 문 밖의 혜지를 쾅 쾅쾅 흉내내는 무언가가 쾅쾅쾅 쾅 쾅 집 안에 들어오지 않기를 쾅쾅쾅 쾅쾅쾅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월로의 심장박동도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거세져 갔다. 이불은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고, 월로는 혼란스러웠다.

이대로 문이 박살 나버린다면, 반드시 나는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직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월로는 눈을 질끔 감았다.

.
.
.




"정신이 드세요?"

눈을 떠보니, 진주단 기지 텐트 안에서 혜지와 함께 다른 진주단 사람들이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혜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방금 전 꿨던 꿈이 떠올라 월로는 순간적으로 주춤했으나, 눈 앞의 혜지는 자신이 알던 '진짜' 혜지임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많이 다쳤어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제가 마침 일 때문에 근처에 없었다면 어쩔뻔 했어요? 저 진짜..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했잖아요."


혜지는 월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화내는듯 하더니, 금방 눈시율이 붉어져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않으려 애쓰는 혜지의 모습에 월로는 죄책감을 느꼈다. 눈물은 혜지의 뺨을 타며 끝을 모르고 계속 흘렀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제가 부주의 했어요. 다신 걱정시키지 않을 게요. 울지 마요."


월로는 다급하게 혜지의 손을 잡으며, 제발 나때문에 울지 말라고 애원하듯 재차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다. 살면서 이렇게나 미안한 감정이 들었을 때가 있었을까?


절벽에 떨어져 쓰러져있을 때, 잠들기 직전에 저멀리 눈보라 속 당신의 실루엣이 보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신이 나를 구하러 온 것이 틀림 없었다. 동시에 나를 저승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무언가도 당신을 따라하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구해준 것도 당신, 아마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월로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울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본인도 같이 울고 있는 것이, 곁에 있던 진주단원들 입장에선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한 해프닝처럼 보였다.


"월로님, 아까 혜지님이 월로님을 여기까지 데려오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 거예요."

"맞아요, 혜지님에게 고마워 하셔야 해요."

"좋은 배필을 두셨네요, 다음엔 다치지 마세요~"


진주단원들은 한 두 마디씩 월로에게 말하곤 텐트 밖으로 나갔다. 다들 두 사람의 눈물겨운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저 둘은 정말 사이가 좋구나.
깜깜한 밤에도 별들은 촘촘하게 모여 하늘을 밝혔다.








- 글 밖의 말

저승사자는 고인의 영혼을 데려가기 전에 이름을 세 번 부른다며. 거기에 고인이 대답하는 순간 인도를 받아 저승으로 가게 된다고. 그래서 그런 꿈을 꾸거든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해.

그리고 저승사자는 외모가 아름답거나, 생전에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대. 고인을 인도하는데 거부감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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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𝐹𝐾𝐽 - 𝑌𝑙𝑎𝑛𝑔 𝑌𝑙𝑎𝑛𝑔